
세상에 ‘어른을 위한 동화’라는 말만큼 역설적이면서도 설득력 있는 표현이 또 있을까.
1972년 출간된 트리나 폴러스의 『꽃들에게 희망을』은 그 짧고 단순한 서사에도 불구하고 반세기 넘도록 전 세계 수백만 독자의 가슴에 불씨처럼 남아 타오르고 있다. 이 책은, 아이들에게는 따뜻한 교훈을, 그리고 어른들에게는 냉정한 자각을 보여준다.
트리나 폴러스(Trina Paulus, 1931~)는 미국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 출신으로, 독일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농장 생활에 익숙한 환경에서 자랐다. 신앙심이 두터운 가톨릭 집안의 영향으로 10대부터 가톨릭 단체에서 활발히 활동했으며, 18세에 대학 장학금 두 개를 제안받았지만 진학을 포기하고 이집트 아흐밈으로 건너가 가난한 여학생들을 돕고 여성 자수 협동조합 설립에 기여했다. 국제 여성운동 단체인 '그레일(The Grail)' 회원으로 14년간 공동농장에서 우유를 짜고 채소를 재배하며 공동체 생활을 했던 그녀는"희망을 전 세계에 전파하는 일"을 자신의 인생 목적으로 삼았다. 1969년 미국으로 돌아온 후 한 출판사와의 인연으로 500달러의 계약금을 받고 2년여 동안 고심한 끝에 이 작품을 완성했다.
삶을 살다 보면 문득 멈춰 서서, 내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묻게 되는 순간이 있다. 아침부터 밤까지 쉼 없이 반복되는 일과, 타인의 기준에 나를 맞추며 살아가는 나날 속에서, 이게 과연 내가 원하던 삶이었는가 하고 말이다. 트리나 폴러스의 『꽃들에게 희망을』은 바로 그런 질문을 품은 사람에게 깊고도 조용한 충격을 주는 책이다. 단지 동화라 부르기엔 너무 단단하고, 철학서라 부르기엔 너무 부드러운 이 책은, 한 마리 애벌레의 이야기로 시작해, 독자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한 ‘진짜 나’와 마주하게 만든다.
이야기는 "아주 옛날, 작은 호랑 애벌레 한 마리가 오랫동안 아늑한 보금자리가 되어 주었던 알을 깨고 나왔습니다"로 시작된다. 처음에는 나뭇잎을 먹고 자라는 단조로운 일상에 만족했던 호랑 애벌레는 어느 날 문득 생각한다.
"그저 먹고 자라는 것만이 삶의 전부는 아닐 거야. 이런 삶과는 다른 무언가가 있는 게 분명해".
이는 현대인이 일상의 루틴에서 벗어나 더 의미 있는 삶을 추구하려는 욕구와 정확히 일치한다. 물질적 풍요 속에서도 공허함을 느끼는 현대인의 실존적 고민을 애벌레의 순수한 시선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렇게 애벌레는 본능에 이끌리듯 여행을 시작하고, 마침내 수천, 수만 마리의 애벌레들이 서로를 밟고 기어오르는 ‘애벌레 기둥’을 발견하게 된다. 수천수만 마리의 애벌레들이 서로를 밟고 올라서며 꼭대기를 향해 기어오르는 거대한 기둥에서 중요한 것은 아무도 꼭대기에 무엇이 있는지 모른다는 점이다.
"꼭대기에는 뭐가 있지?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 거지?"라는 질문에 다른 애벌레는 "나도 몰라, 그런 건 생각할 시간도 없단 말이야"라고 답한다. 이는 목표 없는 경쟁, 방향성 없는 성취욕으로 가득한 현대 사회의 모습을 정확히 포착한다.
애벌레 기둥에서는 "밟고 올라서느냐, 아니면 발 밑에 깔리느냐"만이 존재한다. 친구도 연인도 경쟁에서는 장애물이자 디딤돌일 뿐이다.
모두들 그 기둥의 꼭대기를 향해 오르고 있었고, 줄무늬 애벌레도 그 틈에 섞여 올라가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아무도 그 꼭대기에 무엇이 있는지를 모른다는 것이었다. 다들 너무 바쁘고, 너무 치열해서 질문할 겨를도, 고민할 틈도 없었다. 그저 올라야 한다는 압박감, 남에게 뒤처질 수 없다는 강박만이 그들의 등을 떠밀고 있을 뿐이었다.
그 기둥 위에서 줄무늬 애벌레는 노란 애벌레를 만난다. 둘은 서로에게 끌리고, 사랑에 빠져 경쟁을 포기한 채 기둥에서 내려와 조용한 곳에서 함께 살아간다. 둘만의 평화로운 공간에서 "마음껏 풀을 뜯어 먹고 신나게 놀며 사랑을 키워"가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호랑 애벌레는 다시 기둥 꼭대기에 대한 호기심을 억누를 수 없게 된다. 여전히 기둥의 꼭대기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싶었고, 그것이 행복의 정답일 수도 있다는 미련을 지울 수 없었다. 결국 그는 다시 기둥을 향해 떠난다.
이는 안락함에 안주하는 것 역시 진정한 해답이 아님을 시사한다. 사랑과 평화로운 일상은 소중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존재의 근본적 의미를 찾을 수 없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남겨진 노란 애벌레는 슬픔 속에서 방황하다가, 우연히 늙은 애벌레를 만나게 된다. 그는 말한다. “높은 곳에 이르는 길이 꼭 올라가는 것만은 아니야.” 그러면서 스스로 고치를 만들고 나비가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노란 애벌레는 망설인다. 이 변화의 길이 너무 두렵기 때문이다. 한 번 고치에 들어가면,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결국 애벌레로서의 삶을 포기하고, 스스로를 고치 속에 가둔다.
이는 진정한 변화가 안전지대를 벗어나는 용기에서 시작됨을 보여준다. 고치 속의 시간은 "고치 밖에서는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내부에서는 완전한 변화가 일어나는 시간이다.
한편 기둥 꼭대기에 도달한 호랑 애벌레가 발견한 것은 완전한 허무함이었다. 그토록 고생해서 올라온 기둥이 "수천 개의 기둥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었고, 꼭대기에는 정말로 아무것도 없었다. 그동안 자신이 겪어온 치열한 경쟁, 그로 인해 포기하고 짓밟았던 모든 것들이 전부 허상이었음을 깨닫는다. 더 충격적인 것은 그 꼭대기에 있는 애벌레들조차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더 많은 애벌레들이 이 무의미한 기둥을 계속 오르게 하려고 진실을 숨기고 있었다는 점이다. “조용히 해. 우린 지금 저들이 올라오고 싶어 하는 곳에 와 있단 말이야!”라는 말은, 오늘날 사회의 기득권이 현실을 어떻게 은폐하는지를 날카롭게 상징한다.
바로 그 순간, 그가 한때 사랑했던 노란 애벌레가 나비가 되어 날아오른다. 어떤 경쟁도 없이, 어떤 기둥도 없이, 자유롭고 경쾌하게 자유롭게 날아오른다. 줄무늬 애벌레는 그제야 깨닫는다. 애초에 자기가 찾던 행복은 기둥 위에 있지 않았다는 것을 말이다. 자신도 나비가 될 수 있었다는 것도 같이 깨달으며 그리고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이야기는 단순한 우화가 아니다. 우리 모두는 어딘가에서 애벌레 기둥을 오르고 있다. 좋은 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안정된 직장을 얻기 위해, 더 나은 직급, 더 많은 연봉, 더 멋진 명함을 얻기 위해 끝없이 오르고 또 오른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그 꼭대기에 무엇이 있는지를 알고 있는가? 정말 그곳이 우리가 원하는 행복일까? 혹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기어오르는 삶’ 그 자체가 목표가 되어버린 건 아닐까? 이 책은 단지 그 질문 하나만으로도, 지금의 나를 되돌아보게 만든다.
이 책이 단순히 ‘경쟁을 멈추라’는 말만을 던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트리나 폴러스는 기둥을 부수자고 말하지 않는다. 경쟁하는 사람들을 비난하지도 않는다. 그저 “기어오르지 말고 날아오르라"라고 말할 뿐이다. 그러기 위해선 완전히 다른 길을 선택해야 하고,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존재해야 한다. 고치 속의 고독함을 견뎌내야 하고, 모든 것을 내려놓는 용기를 내야 한다. 이 변화는 더 이상 경쟁하지 않겠다는 선언이 아니라, 아예 그 경쟁 자체를 넘어서는 선택이다.
나비가 된 노란 애벌레는 다시 기둥 아래로 내려와 다른 애벌레들 곁을 맴돈다. 하지만 어떤 강요도 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이 나비가 된 모습, 날아오를 수 있다는 가능성만 보여줄 뿐이다. 진정한 변화는 설득이나 강요가 아니라, 존재의 힘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작가는 조용히 전하고 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기둥 꼭대기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마음 한구석에는, 나도 어쩌면 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미한 가능성이 자라고 있다. 다만 우리는 그것을 믿지 못할 뿐이다. 너무 바쁘고, 너무 불안하고, 너무 외롭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꽃들에게 희망을』은 한 권의 책 그 이상이다. 그것은 한 마리 나비의 조용한 날갯짓이자, 우리 모두에게 던지는 근원적 질문이다.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나는 지금 기둥을 오르고 있는가. 아니면 고치를 만들 준비가 되었는가.
삶을 바꾸는 건,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경쟁의 바깥에서 자유롭게 날 수 있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다. 그 믿음 하나로, 우리는 지금 이 자리에서 나비가 될 수 있다.
책의 마지막 장에 “끝.”이라고 쓰인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면 “아니.. 새로운 시작입니다.”라는 진짜 마지막 문장은 이 책의 모든 것을 말해준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 삶의 진짜 이야기도, 바로 지금부터 시작되는 것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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