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등의 비극
클래식 음악을 잘 모르더라도 모차르트의 이름은 누구나 안다. 그렇다면 살리에리라는 이름은 어떨까? 아마 대부분은 고개를 갸우뚱할 것이다. 안토니오 살리에리는 18세기 유럽에서 가장 성공한 작곡가 중 한 명이었다. 황실 궁정 작곡가라는 최고의 자리에 올랐고, 베토벤과 슈베르트 같은 후배들을 가르쳤을 정도로 인정받는 음악가였다. 실제로 그는 모차르트를 지지했고, 모차르트가 죽은 후에는 그의 아들을 가르치기까지 했다.
그런데 1984년 개봉한 영화 《아마데우스》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영화 속 살리에리는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질투하며 평생을 괴로워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분명 자신도 당대 최고 수준의 작곡가였지만, 모차르트와 비교되는 순간 그의 음악은 '평범함'이 되어버린다. 아무리 훌륭한 곡을 써도, 아무리 많은 사람의 찬사를 받아도, 결국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건 모차르트뿐이다. 영화는 끝없는 비교와 질투 속에서 자신의 뛰어난 재능을 보지 못한 채 불행하게 살아가는 2등의 비극을 강렬하게 그려냈다. 이 영화가 대중문화에 큰 반향을 일으키면서, '살리에리 증후군'이라는 용어가 탄생했다.
객관적으로는 높은 성취를 이루었음에도, 자신보다 앞선 누군가와의 끝없는 비교로 인해 열등감, 질투심, 억눌린 자괴감에 시달리며 자신을 실패자로 여기는 현상을 의미한다. 영화의 파급력과는 아이러니하게도 살리에리와 모차르트의 라이벌 관계는 대부분 허구다. 영화가 극적 재미를 위해 만들어낸 이야기일 뿐이다. 하지만 진실이 어떻든, 살리에리의 저주는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직장에서, 학교에서, 일상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누군가와 비교당하고 비교하며 자신의 가치를 잃어버린다. 그 이름 뒤에는 우리가 모두 한 번쯤 경험했을 법한 2등의 비극이 숨어 있다.
마크 맨슨의 《신경 끄기의 기술》에 등장하는 데이브 머스테인(Dave Mustaine)의 이야기는 현대판 '살리에리 증후군'을 잘 보여준다. 데이브 머스테인은 전설의 록밴드 메탈리카의 초기 멤버였지만 음주 문제와 성격 차이로 밴드에서 쫓겨나게 된다. 그는 좌절감과 복수심을 원동력으로 그룹 메가데스를 결성했다.
그 결과는 어땠을까? 놀라운 성공이었다. 메가데스는 전 세계적으로 5천만 장 이상의 음반을 판매했고, 그래미상을 받았으며, 스타디움을 가득 채우는 월드 투어를 성공시켰다. 이는 객관적으로 봐도 록 역사상 손꼽히는 성공이었다. 하지만 머스테인은 2003년 인터뷰에서 눈물을 흘리며 고백했다. "나는 여전히 실패자처럼 느껴진다." 이 말은 그의 엄청난 성공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그의 눈엔 오직 메탈리카만 보였다. 1억 3천만 장 이상의 음반을 판매한 전설 중의 전설 메탈리카 말이다. 머스테인의 성공 기준은 '메탈리카보다 성공하기'였고, 그 기준으론 영원히 실패자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이룬 엄청난 성취에도 불구하고, 5천만 장의 성공이 실패로 변해버린 순간이었다.
잘 살아야 한다는 강박
사람들은 뛰어난 이들뿐 아니라 누구든 비교의 대상으로 삼는다. 하지만 더 교묘한 함정은 평균이라는 덫에 있다. 평균 재산이나 연봉 같은 숫자는 세상의 기준에 부합하는지 가늠하는 잣대가 되지만, 이 숫자는 현실의 복잡함을 담아내지 못한다. 통계에서 평균은 전체 데이터의 합을 개수로 나눈 값이다.
문제는 이 평균이 극단적인 값들에 쉽게 왜곡된다. 작은 동네에 억만장자가 이사 오면 평균 소득은 치솟지만, 대다수 주민의 삶은 그대로다. 이때 이 숫자에 현혹되어 모두가 부자가 됐다고 믿는 이는 없다. NBA의 전설 마이클 조던의 연봉도 당시 NBA 선수 평균 연봉을 훨씬 뛰어넘는 극단적인 수치였다. 그 결과, 그의 높은 연봉은 그가 졸업한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 졸업생들의 평균 소득을 끌어올렸지만,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 졸업생이라고 해서 모두가 평균만큼 벌진 못한다.
이처럼 평균의 함정은 사람들에게 잘못된 비교군을 제시한다. 그럼에도 미디어와 사회는 끊임없이 평균이라는 이름의 비현실적인 기준을 주입하고, 사람들은 마치 그 수치에 도달하지 못하면 실패했다고 생각하며 자책한다. 진실은 평균이란 실제론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인물이고, 정작 우리가 좌절하는 이유는 평균이라는 가면 뒤에 숨은 소수인데 말이다.
평균의 함정에 빠지고 살리에리의 저주에 걸리는 궁극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바로 "잘 살아야 한다"라는 강박이 기저에 깔려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말을 가만히 곱씹어 보자. 뭔가 이상함이 느껴진다는 걸 눈치챘는가?
"잘 살아야 한다"라는 말 앞에는 숨겨진 다른 조건이 있다. "너보다 잘 살아야 한다", "쟤보다는 잘 살아야 한다" 그 잘 살아야 한다는 강박도 누군가와의 비교를 통해 우월감을 느끼는 살리에리의 저주인 셈이다.
현대 사회는 언제나 줄을 세운다. 외모, 재산, 직업, 학벌 모든 것에 서열이 있고, 그 서열에 따라 사람의 가치가 자동으로 매겨진다. 표면적으론 "모든 것에 귀천은 없다"라고 말하며 평등과 소중함의 가치를 논하지만, 은연중에 그리고 스스로가 자신의 서열을 알고 있다. 단지 티를 내지 않을 뿐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비교의 늪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한다. 이 저주를 스스로 자각하지 못한다면 평생 늪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살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살리에리의 저주는 어디에나 있다. 직장에선 같은 해 입사한 동기가 먼저 승진했을 때나 같은 대학 출신이 더 좋은 회사에 취직했을 때 나타난다. 창작자들에겐 유튜브 구독자 수, 베스트셀러 순위, 팔로워 수가 그것이다. 학생들에겐 성적 순위와 명문대 진학이 삶의 모든 걸 좌우하는 기준이 된다.
잘 살아야 한다는 강박이 심해지면 완벽주의로 변질되는데 이는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까지 괴롭힌다. 더욱이 완벽을 추구할수록 역설적으로 모든 것에 만족을 느끼지 못한다. 완벽주의자에겐 100점이 아니라면 99점도 실패이기 때문이다. 목표를 달성해도 아쉬움만 남고, 언제나 부족함에 시달리며 삶이 공허해진다.
사람은 모두 다르다. 누군가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일에 다른 누군가는 절망을 느끼기도 한다. 어떤 사람에겐 사소한 실패가 다른 사람에겐 인생을 뒤흔드는 좌절이 될 수도 있다. 이런 개인차를 무시하고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기준을 적용하는 건 억압적이고 폭력이 된다. 각자가 가진 성향, 능력, 환경, 가치관이 모두 다른데 규격화된 성공모델을 강요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우리의 생김새가 다르듯 각자가 추구하는 행복의 모습이 모두 다른데 말이다.
때론 우울하고 슬퍼도 괜찮다. 그게 정상이다. 모든 사람이 평균에 맞추려 한다면 사회는 획일화될 수밖에 없다. 개성이 중요한 시대라고 말하면서도 평균이라는 기준을 강하게 적용하는 건 역설이며, 고유한 가치를 놓치게 만든다.
그럼, 모든 것을 포기한 채로 살아야 할까? 다시 한번 가만히 생각해 보자. 타인과의 비교를 배제하고 생각해 보면, '잘 사는 것'의 기준은 누가, 어떻게 정한 것일까? 그리고 진짜 내 삶에서 잘 살고 행복한 건 무엇일까? 남들이 정해놓은 기준에 맞추려다 보니 정작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게 무엇인지 모르게 된다. 본인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남들도 가졌으니, 자신도 가져야 한다는 비교가 곧 강박으로 변한다.
그렇다면 해답은 무엇일까? 사회가 정해놓은 성공의 기준이 아니라 나만의 의미 있는 기준을 세워야 한다. 내가 무엇을 원하고 갈망하는지 자신에게 질문해 보고 내면을 탐구하면서 답을 찾아야 한다. 그것이 살리에리의 저주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다.
작은 승리의 힘
작은 성취는 삶에 커다란 힘을 준다. 사람들은 성취를 하나의 트로피로 간주하고 1등이 아니면 모든 게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성취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영역이다.
예를 들어, 밥을 남기던 사람이 밥 한 공기를 다 비우는 순간, 그에게는 작은 승리의 기쁨이 찾아온다. 남을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의 만족을 위해 기준을 세운다면 비교의 덫에서 벗어날 수 있다. 특히, 비교는 모든 것을 상대적으로 만든다. 키를 예로 들어보자. 누군가와 비교하면 나는 키가 작거나 크지만, 오롯이 나 자신으로 존재할 때 나는 그저 나일 뿐이다. 그렇기에 진정한 성취는 남과의 경쟁이 아닌, 자신만의 기준을 정해야 한다.
그 첫 번째가 편향적 사고를 깨뜨리는 것이다. 새로운 레시피로 요리를 해보거나 평소와 다른 길로 출근하기, 장르를 가리지 않고 새로운 음악 들어보기, 한 번도 읽어보지 않은 분야의 책 펼쳐보기처럼 새롭지만, 작은 시도들은 실패해도 괜찮다. 이런 안전하고 작은 모험들이 고정적인 편향적 사고를 깨뜨려준다. 실패해도 자신의 삶에 전혀 영향이 없어서 부담 없이 시도할 수 있고, 성공하면 작은 성취감과 기쁨은 선물이다.
작은 도전의 경험들이 쌓이면서 생각의 확장이 일어나고, 더 큰 도전에 대한 용기도 생기게 된다. 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작은 성취를 인정하고 축하할 때 뇌에서 도파민이 분비되어 긍정적 피드백 루프가 형성된다. 이건 더 큰 목표를 향한 지속적인 동기부여로 이어지는데 작은 발전이라도 지속적으로 이루어질 때 가장 큰 만족감을 느낀다. 이를 '작은 승리', '스몰윈(Small wins) 효과'라고 말하는데 작은 성취감은 자존감을 높이고 스트레스를 완화한다.
특히, 큰 목표를 작은 단위로 나누어 하나씩 달성해 나갈 때, 뇌의 보상 시스템이 활성화되어 지속적인 동기부여가 가능해진다. 체중 감량을 목표로 할 때 단번에 10kg 빼기는 부담스러운 큰 목표이지만 일주일에 0.5kg씩 빼기는 달성할 수 있는 작은 목표다. 후자의 경우 매주 체중계에서 확인하는 작은 변화가 긍정적인 피드백을 주어 지속적으로 목표를 향해 나아갈 수 있게 한다. 큰 목표보다는 지금 당장 달성 가능한 작은 목표에 집중하는 게 중요하다.
살리에리의 저주는 어디에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의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할 수도 없고, 모든 영역에서 평균 이상일 수도 없다. 그리고 그게 정상이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 "잘 살아야 한다."라는 강박은 우리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게 아니라 오히려 현재의 행복을 빼앗아 간다. 진정 중요한 건 남들이 정한 기준에 맞추는 게 아니라, 자신만의 속도로 자신만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때론 남들보다 느려도 괜찮고, 때론 다른 방향으로 가도 괜찮다.
평균에서 벗어나는 게 문제가 아니라, 자신다움을 잃는 게 진짜 문제다. 모차르트처럼 완벽할 필요도, 메탈리카처럼 대중적일 필요도 없다. 중요한 건 내가 연주하는 음악이 나에게 기쁨을 주는지, 내가 걷는 길이 나를 성장시키는지다. 그 과정에서 작은 성취들을 하나하나 쌓아가며, 남과의 비교가 아닌 어제의 나와 비교로 살아간다면, 자신의 걸음으로 내디딘 발자국 모두가 진짜 자신의 인생이 될 것이다. 인생은 완벽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다워지는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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